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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불하고 싶다/허윤설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 1주년 기념기획/ 홍영수 시인의 부천의 문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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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1.0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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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0월 부천시는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유네스코 문학창의 도시로 지정되었습니다. 문학창의 도시 지정 1주년을 맞아 <부천 시티저널>에서는 홍영수 시인의 "부천 문인들 문학의 향기"를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가불하고 싶다/허윤설

      

허리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어

침 맞고 물리치료 받고

알약을 한 움큼 먹어도

쉬이 낫지 않는다

 

욕심부리지 않아 지갑 얇아도

무탈한 날들에 감사하던 때

복병처럼 나타난 폭풍에

기대고 있던 중심이 무너졌다

지난날은 꿈만 같고

가야 할 길은 가시밭길이다

두 다리가 자꾸만 주저앉는다.

 

커진 덩치만큼 생각이 다른 자식들

내일을 향해 가려는 길 불안해 보여

핑계 삼아 삼키던 하루가

실타래처럼 뒤엉키는 일 잦아

미래를 가불하고 싶다

10년만,

 

 

시집 <마지막 버스에서>. 푸른사상. 2019.

 

The_Oaktree_in_the_Snow.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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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그의 저서 <카메라 루시다>에서 사진을 보는 기준을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으로 나누었다. 스투디움은 작가의 촬영 의도를 알 수 있는 일반적으로 보는 관점이고 푼크툼은 작품 안에서 아주 부분적이고 사소한 것들이 감상자의 마음을 감동 또는 가슴을 울리거나 상처를 주는 것이다. 타인에겐 별로인 작품의 한 부분이 자신에게는 번뜩이며 다가오는 것. 예를 들어 <>이라는 다소 선정적인 영화를 보면서도 어릴 적 누에를 힘들게 치는 어머니를 그리며 뽕나무의 생각에 눈물짓는 아이러니 같은 것이다.

 

이렇듯 필자 또한 한 편의 시를 대할 때 푼크툼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의도대로, 교과서적이고 틀에 박혀 프로그램화 된 감상이 아닌,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가불하고 싶다의 시는 태풍으로 무너져버린 중심이 시를 읽는 중심이 되어 필자의 가슴에 닿았다. 문학의 비 프로그램화와 같은 일종의 푼크툼 감상법이 아닐까 스스로 이름 지어 본다.

 

욕심을 덜어내고 욕망을 억제하니 그 얼마나 평안한 마음인가. 어느 누군들 욕심이 없고 욕망이 없겠는가. 이미 심연의 밑바닥에부터 꽉 채워져 있다. 다만, 마음으로부터 비우고 또 비우려고 할 뿐이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화자는 이미 비움을 실천하고 있다. 그렇기에 허기진 지갑과, 특히 가족의 무사, 안녕함 외에 바랄 것이 없이 소탈한 일상 속에 빈곤의 풍요와, 비움의 충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종교적 케노시스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요와 평온의 바다 속에 미처 볼 수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검은 그림자가 숨어 있었다. 다름 아닌 느닷없는 폭풍이다. 여기서의 폭풍은 화자의 집안 중심인 대들보를 무너뜨리는 악마인 것이다. 왜냐면 집의 중심은 대들보이고 대들보가 무너지면 중심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찌, 알았겠는가. 묵묵히 무언의 침묵으로 헌걸차게 버티고 서 있는 저 대들보의 늠연한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비바람에 씻기어 패인 상처의 깊이를 혼자 삼키고 인내하는 곧은 상기둥의 단단한 마음을. 무너진 중심에서 비로소 알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상생활에서의 태풍은 기미幾微를 알아차리지만 삶이라는 바다에서는 갑자기 솟구치는 용오름과 같고, 갑자기 휘몰아치는 사막의 사막풍처럼 어둡고 무서운 형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고 마냥 태풍만 탓할 게 아니다. 알약과 물리치료와 침도 소용이 없다. 태풍에 의해 조각난 상처의 조각들을 꿰매야 하고 핥기고 쓰러진 마음자리도 다스려야 한다. 반반했던 길이 가시밭길이 되었다고 발길을 돌린다든지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태풍은 중심을 무너뜨리고 지나간 과거일 뿐이다.

 

말없이 든든하게 집안을 지탱해줬던 수직과 수평의 목재를 앗아 가버린 황량한 집안, 그 대들보 속에 잠긴 묵직한 나이테의 마음을, 태풍 속 고요함 같은 섬 하나를 간직했던 대들보의 외로움을 미처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할 일은 아니다. 이제 눈과 몸에 익숙했던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 소유와 욕망과 육신의 끈에 매달린 삶. 타성에 젖은 삶 밖으로 뛰쳐나와야 한다. 장자의 수양론인 心齋”, , 마음속 모든 것들을 버리고 육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록 언제든 쉴 수도 앉을 수도 비를 피할 수도 있는 생명줄 같은 정류장이 없어졌더라도 언제까지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밤이란 또 어찌 하리오의 청산별곡이나 가시리, 公無渡河歌만을 읊조리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기억해야 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 모두 언젠가는…… 다소의 시차가 있을 뿐.

 

동토를 뚫고 나온 새순을 보자.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묻힘은 묻힘이 아니지 않은가. 얼음장 밑에서도 생명수는 흐르고 언 땅에서도 씨앗은 싹트고 폭풍의 떨림에서도 부름켜의 왕성한 활동상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울음을 그치고 생각을 바꾸자. 아픔이 아픔만은 아니다는 것을. 그래서 희망의 싹을 틔우자.

 

그렇다, 자식은 품 안에서만 존재한다. 부모와 자식은 1촌이다. 미세한 거리감이 있다는 것이다. 1촌의 간극을 엇붙임 해야 한다. 화자의 마음은 무촌이라 생각하기에 생각을 벗어나면 서운하고 불안하다. 삶의 해시계를 잃은 자식들 또한 엄마보다 더한 순간의 어둠을 삼켰으리라. 그렇지만 말이 없다. 자기들보다 더 아파할 엄마를 위해. 훌쩍 커버린 덩치만큼 가족애도 살 찌웠으리라. 굳이 가불 하지 말자. 가불은 갚아야 하기에. 차라리 엉킨 실타래 한 올 한 풀어 한 땀 한 땀 사랑의 옷감을 꿰매자. 10년이 아닌, 천년 세월의 옷을 재단하자.

 

새해가 밝았다. 小寒이 코앞이다. 우린 춥고 거친 황량한 겨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자.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 폭풍의 아침(Der stuermische Morgen)’에서 노래하고 있다.

 

 

시인 홍영수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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