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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재학 에세이 (6) 마라톤, 멀고 먼 길(마라톤 이야기3)
가랑비의 힘은 무서웠다. 비라고 하기에도, 그렇다고 비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가랑비가 속옷까지 적시고 온 몸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듯이 지속되는 종선의 마라톤 타령은 힘을 가지고 나를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저녁에 종선의 전화가 없으면 나는 전화기 앞에서 전화를 기다렸고, 나중에는 전화를 한번 걸어볼까 하는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했다. 그것은 오직 마라톤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마라톤을 하는 것은 두려웠지만 마라톤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가 있었다. 나는 마라톤이란 어마어마한 단어의 힘에 짓눌려서 기를 펴지 못한 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종선의 한마디가 나를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종선이 말했다. “재학이형 우리 산에 가면 항상 앞장서서 가는 사람이 형 아니야. 산에 가면 늘 형의 엉덩이만 보고 따라가던 나도 마라톤을 했는데 형이 왜 못해?” “야 산에 가는 것 하고 마라톤하고 갔냐. 산이야 올라가면서 경치도 감상하고, 힘들면 쉬기도 하고, 아무리 많이 걸어도 몇 킬로 밖에 안 되지만 마라톤 하면 42km를 걷는 것도 아니고 쉬지 않고 달리는 건데 마라톤을 산하고 비교하면 안 되지.” “누가 처음부터 42km를 뛰나. 처음에는 10km도 달리고, 다음에는 21km도 달리고 하다 충분히 연습이 되고 자신감이 생기면 42km풀코스마라톤을 하는 거지.” 나는 종선의 10km, 21km라는 말에 귀가 번쩍 열렸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마라톤은 오직 42km풀코스마라톤만 있는지 알고 있었다. 종선에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10km라면 이십 오리(4km 십리)에 불과하니 한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나는 저녁에 시간이 나거나 주말이면 전에는 하지 않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괜히 아무런 생각 없이 동네를 걷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나의 행동을 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나만의 마라톤의 시작이었다. 동네를 돌아다니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감이 생긴 나는 도전에 나서기로 했다. 우리 집에서 5km쯤 떨어진 작은집을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이후 산에 갈 때 이외에는 이렇게 먼 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었고, 언감생심 작은집을 걸어간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몇 날 몇 칠을 벼르다 막상 작은집을 향해 출발했지만 십리가 좀 더 되는 그 길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멀었다. 좀 가다 힘들면 쉬고, 무슨 볼거리라도 있으면 구경을 하면서 쉬엄쉬엄 작은집을 향해 갔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작은집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단지 걸어서 작은집을 가는 게 목표였으므로 작은집을 걸어간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오히려 반전은 작은집에 도착해서 발생했다. 집에서부터 걸어서 왔다는 말에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는 깜짝 놀라시며 쓸데없이 왜 걸어왔냐면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힘들지 않았냐고 몇 번을 묻고 다음부터는 걸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걸어간 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작은집을 걸어가는 첫걸음을 뛴 다음에는 가끔씩 작은집으로 걸어가거나 반대로 작은집에서 집으로 걸어왔다. 작은집으로 걷기가 반복되면서 작은집으로 걸어가는 방법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몇 번 작은집으로 걷기를 한 다음에 제일 먼저 시도한 것은 한 번도 안 쉬고 작은집까지 걸어가기였다. 한 번도 안 쉬고 작은집까지 걷기가 가능해지자 단계를 높여서 일정한 속도로 작은집까지 걸어갔다. 그 다음에는 또 단계를 높여서 좀 더 빠르게 걸어가기를 시도했다. 여기까지 가능해지자 은근히 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뛰고 싶다는 마음이 온몸으로 빠르게 펴져나갔다. 그러나 마라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에세이] 1부 - 마라톤을 시작하다 1-손목을 자르고 싶었다 2-미쳤구나 미쳤어 3-마라톤, 멀고 먼 길(마라톤 이야기3) 4-뛰고 싶어 하는 마음 5-여우고개를 올라가서 본 것 이재학 작가 마라토너, 소새울 소통미디어 협력단 대표, 부천 소새울에 산다 발행인(전), 복사골문학회, 부천수필, 부천시인 저서 『나는 마라토너다』 『길에서 다시 찾은 행복마라톤』 『황소도 말처럼 뛰나』 『엄마가 치매야』 『소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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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에게
단 비 한 주름이 네 생각을 불러 왔는가 가뭄에 눌렸던 숨결을 고루고 어기찬 갈증도 씻어내고 십년 세월에 등으로 쬐이는 불빛처럼 따습던 사람 너를 향해 마음의 문을 열었다 솔숲의 묏새를 닮아 확 트인 목청으로 울고프던 날은 가고 오는 후조(候鳥)인양 서로의 마음밭에 찔레꽃의 둥지를 키워 왔음이여 오늘 새삼 나를 울리누나 좋고 하찮음을 한 가지 정으로 쓰다듬기에 봄 가을의 절기 겹치던 사이 무료히 앞산을 바라보듯 너를 찾을양이면 언제나 뿌듯한 미소로 맞아 주던 얼굴 벗이란 기실 연인보다 너그러운 가슴 깊은 정이야 명주 열두겹 속에 감춰둘 보배 내쳐 말하지 말고 살자꾸나 내 슬픔에 수심져 주고 그 기쁨에 내가 흡족턴 마음 둘이 한마음으로 늙어나 가리 고마운 내 벗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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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구지
깊은구지 서금숙 구지 그 곳을 말하자면, 땅이 낮을수록 뿌리는 깊다 숲 개별꽃 날아오르고 공기는 차다 돈 벌러 간 골목은 고요하고 잠잠해 제일먼저 화려함을 떨치려는 국화 잘생긴 이마 반질한 먹감, 땅볼 친 밤송이 민첩한 내야수를 기다린다 골바람 깃들어 슬며시 열린은행 골자래는 은행알 터지기 전 샅샅이 훑는다 꽃단장한 색시를 안식구로 앉힌 구멍가게 맵고 짠 시름 비빈 초록 성찬 산 위에 얹혀 있는 마을 일화 한 토막 어우르는 여윈 고개 너머 세파에 찌든 때를 대비 해야할 송내어울마당 갈 채비를 할 아침결 난데없이 뻐꾸기 한 마리가 날아와 내 집 베란다에 대고 목청을 높여 뿌리 깊은 소리로 다사하게 운다 서금숙 2019년<월간 시문학> 등단. 2017 부천신인문학상. 부천여성문학회 회장, 시문학시문회 사무국차장. 시작 메모: 주민등록증을 새로 발급받고 새로 태어나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어 한국방송통신학교 지역학습관이어던 곳에 새로 지어진 송내 어울마당으로 들어가 봤다. 제일 먼저 도서관으로 올라가서 시집 네 권과 오로지 가게 밖을 모르는 남편이 가여워 ‘돈 좀 그만 벌자’라는 책을 대여했다. 그리고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출입구 쪽에 안내된 시 창작반을 발견했다. 뭔가 태동하는 쌔한 느낌이 든다고 할까.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리고 수개월 짬을 내어 주민등록증 갱신하고 시인으로 탈바꿈하려는 순간이 온 것이다. 2016년 6월 이후로 한 달에 네 번 어울마당 지하 1층 시 창작반에 가 있는 동안은 오로지 시만 생각하게 됐다. 그동안 이 동네에서 30년 사는 동안 가게에 충실하고 아이들 키우느라 생각 못 했던 시인이라는 꿈을 꾸게 한 장소인 송내어울마당은 명실공히 문화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다음해인 2017년 부천신인문학상 시부문 대상을 타면서 정말 시인의 길로 안내받은 송내동의 명소로 송내어울마당을 추천한다. 그곳에 가면 그전에 자기 자신에게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고 이웃과 소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깊은구지' 시는 어울마당을 다니며 지은 시이다. 송내어울마당은 송내동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잘 반영한 복합문화시설의 새 이름을 공모하고, 전문가 등의 의견 수렴을 거친 후 내부적인 선호도 조사 및 송내 1·2동 주민 선호도 조사를 거쳐 ‘송내어울마당’으로 선정했다. ‘송내어울마당은’은 소통과 화합을 위해 여러 사람이 모이는 곳을 의미한다. 발음하기가 쉽고 친숙하며 밝고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어 시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복합문화시설이며 지하에는 향토역사관과 체력단련실, 지상 1~2층에는 도서관, 시민학습원, 문화카페 등, 3`5층엔, 부천문화원, 청소년문화의집, 소극장, 문화교실, 방과 후 교실 등이 있다. 노령화시대가 급속히 빨라지는 현시점, 1인 가족이 늘어나면서 삭막해지는 미래의 삶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가장 핫한 공간은 송내어울마당이다. 남편에게도 은퇴하면 어울마당 같은 곳에서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민들을 대상으로 빵 만드는 취미 공유공간을 계획해보라고 했다. 송내어울마당은 안드로메다의 어느 공간을 가기 위한 은하초특급 999호를 타고 가는 여정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곳이다. 송내2동 거마산 아래 지친 현대인의 휴식공간이며 문화공간임을 매번 자랑한다. 나이 지긋한 손님이 우리 빵가게를 방문하면 나처럼 어울마당에서 제2의 인생을 펼쳐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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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花), 악(噩)
화(花), 악(噩) 정령 확 그냥 막 그냥 덮쳐버릴 테야. 물어보지도 않고 두드리지도 않고 불쑥, 함부로, 멋대로, 침묵을 건드렸어. 화악 마, 제대로 보여줄 테야. 물어보기 전에 두드리기 전에 대뜸, 볼쏙이, 무시로, 놀래줄 테야. 담장을 넘은 주홍빛 능소화가 지나던 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쳐다보면서 소리치고 있다. 噩! ⏐정령⏐ 계간 ≪리토피아≫ 등단. 전국계간문예지작품상수상. 부천문협 회원, 부천여성문인협회회원, 아동복지교사 시집 『연꽃홍수』, 『크크라는 갑』, 『자자, 나비야』, 『구름이 꽃잎에게』 시작메모: 시를 쓰는 시인에게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감정을 가진 동물이다. 화를 낼 줄 모른다고 무시해서도 안 되고, 언제나 웃는다고 바보로 알고 경시해서도 안 된다. 사람이 가진 감정 중에 희노애락(喜怒愛樂)의 감정을 부끄러워서, 혹은 쑥스러워서 감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얼굴에는 수 백 개의 근육들이 웃을 때나 슬플 때나 화날 때 나오게 되는 갖가지 표정들을 감출 수가 없게 이루어진 얼굴이라고 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웃고 울고 화를 내야 건강한 사람이 된다. 필자도 화를 잘 내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감정을 길가에 핀 능소화를 빌려서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시도 화난 듯이 소리치며 읽어보라. 괜히 웃음이 나며 그 순간 화냈던 일이 가라앉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 - 시인 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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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빈자리
냉기를 머금은 침대 하나 하얀 시트 위에 적막함이 누워있다. 깊게 파인 육순의 자국 위에 귀를 기울이니 떠나지 못한 당신의 심장 소리 여전히 들려오는 듯 창문 틈새로, 바람을 안고 들어온 차가운 체온이 침대 위에 눕는다. 온기 없는 온기가 따스하다. 숨소리 잃은 베개를 당겨 안으니 한숨에 실린 베갯잇이 긴 한숨을 짓고 메말랐던 눈물 자국이 촉촉한 눈물을 흘린다. 한 생이 저물기 전의 깊이를 알지 못하고 이제야 당신의 고단했단 삶의 한 자락을 휘감으니 따스한 그림자로 가만히 다가와 타오른 그리움의 내 가슴을 감싸준다. 당신은 알고 있을까. 움푹 들어간 베갯속의 허전함을 아직도 세탁하지 않은 침대보에 스며든 고단한 숨소리를 곁에 없어 더 사랑하게 되는 이 절절한 모순 앞에 나의 심장에서 잊혀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과 당신의 기억 속에 내가 지워지는 두려움을 꽉 찬 공허의 그리움으로 동살 잡히는 새벽녘까지 당신으로 하얗게 지새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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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뜨는 달
너무 늦은 걸 까아니면 너무 빨리 온 걸 까흐릿한 수줍은 모습아침에 뜬 달어쩌면 너는 그렇게항상 하늘을 지켰을까밝은 햇살에 가려 외롭게서쪽 하늘을 지키고 있구나시무룩한 아침 모습보다어두운 밤이라도 언제든활짝 웃는 그 얼굴이몹시도 그리워태양도 늙고 지구는 변해도주고받은 정 세월 따라 더 애틋해낮과 밤이 바뀌어 안보일지라도너는 칠흙같은 어둠을 밝혀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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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미 연재 단편소설 "달빛 키스" [3]
- 나를 주저앉혀 놓고는 상보가 덮인 작은 상을 들고 왔다. 파릇한 부추를 넣은 물국수 두 그릇이 정갈하게 놓였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쉽게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눈짓으로, 젓가락으로 재촉을 했다. 한 젓가락 돌돌 말아 먹어 보려는데 울음이 벌컥 터졌다. 그녀가 내 등짝을 퉁퉁 치며 먹지 않으면 혼날 줄 알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엄마에게 혼나고 울음 참는 아이처럼 꾸역꾸역 국수를 먹었다. 상을 들고 나가더니 차를 내왔다. 쑥부쟁이 차란다. 뜨거운 물에 쑥부쟁이가 색바랜 꽃잎을 펼치며 은은한 향내를 풍겼다. 차 맛이 정주 인생을 대변하듯 달짝지근하면서 쌉쌀했다. 이런 차를 마셔 본 적도 없건만 두 잔이나 마셨다. 마음이 가라앉고 퉁퉁댔던 순간이 머쓱해졌다. 햇살을 받으며 산사를 거닐었다. 산사 주변까지 말끔하니 스님들의 손길이 느껴졌다. 뒤뜰 암자 옆에는 어미 개가 드러누워 있고 강아지 두 마리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장난스레 뒹굴고 있었다. “우리 칸츄리 연애는 하니?” “칸츄리가 별수 있나?” “얘야, 연애는 저 강아지들처럼 흙먼지를 일으키며 뒹구는 거란다.” “스님께서 무슨 상스러운 말씀이시래요.” 산길로 들어섰다. 그녀는 산나물과 버섯 따는 얘기를 하고, 나는 대학 다니는 얘기를 했다. 서로를 인정하는 대화가 자연스러웠다. 정주와 이토록 허물없던 적이 있었을까. 학교 땐 왜 그렇게 질투하고 견제했는지. 그 아름다운 시절을. 이제는 스님이라 불러야 할 것만 같아 말끝을 흐렸다. 눈치 빠른 그녀는 말끝마다 칸츄리, 칸츄리했다.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였다. 나는 그대로이나 정주는 분명 다른 세계에 있었다. 나를 암자에서 쉬게 하고 밥을 지어오겠다며 나갔다. 다리를 쭉 뻗고 누웠더니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잊을 정도로 편안했다. 정주야말로 아무 번뇌도 없는 걸까. 그새 잠이 들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났다. 밥상이 들어왔다. 된장국에 갖은 산나물이 입맛을 돋웠다. 초식 만찬이었다. 상을 내갈 때 내 소설이 실린 문예지를 상보에 올려놨다. 그녀가 싱긋 웃었다. 어둑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달이 떴다. 절 마당에 달빛이 고고하니 들어섰다. “오늘 밤 달이 참 밝다. 네가 와서 그런가.” “적적하겠어요.” “편하게 해. 칸츄리!” 마당 가장자리 너른 바위에 앉았다. 가을 풀벌레 소리가 멈칫거리다가 다시 자지러졌다. 달빛이 승복을 비추며 그녀를 더욱 단아하게 만들었다. 고우면서도 안타까웠다. 왜 이런 모습인지. 어이가 없긴 여전했다. 그 남자 만났던 일을 꺼냈다. “그를 우연히 만났어.” “잘 지낸다던?” “그런 것 같았어.” “잘됐네.” “스님이 된 줄은 모르는 것 같았어.” “그런 말 할 거 없어.” “나는 화 나더라. 너와는 오래전 일이라는 거야.” “맞지 뭐.” “비겁한 자식. 예쁜 여자 끼고 돌아다니더라고.” “이런, 성질하고는.” “내가 그간의 사정을 알아야 따지든지 말든지 하지. 왜 헤어졌냐고 캐물었더니 나한테 말할 이유 없다며 홱 가버렸어.” “그래서 왔구나. 잘 왔어.” “이젠 말하지 않아도 돼.” “궁금해서 한달음에 달려 온 우리 칸츄리를 그냥 보내서야 쓰나. 너한테는 말하고 왔어야 했는데 그럴 상황이 못 됐어. 만신창이로 왔으니까.” 말을 멈추었다. 겨우 꺼내 놓고 보니 회한이 이는 모양이었다. 나도 가만히 있었다. “서울에서 동거한 지 2개월쯤 됐을 때 걔네 어머니와 누나가 들이닥쳤어.” “......” “드라마의 명장면이 연출 되었지. 세 사람이 거의 실신 상태가 되었을 때 그가 왔어. 또 한바탕 전쟁이 났지. 그의 어머니가 아들 뺨을 때리고, 아들은 어머니를 끌어안고 누나에게 소리 지르고. 가관이었어.” “왜 그렇게까지.” “우리 엄마 직업을 알아버린 거지.” 그날 밤 그는 어머니를 달래러 따라가서는 오지 않았다고. 며칠이 지나니 남자 둘이 들이닥쳐서 방에 있는 물건들을 장난하듯 둘러 엎었단다. 황새가 뱁새 따라가려다가 가랑이 찢어진다고. 이쯤에서 떠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엄마가 다칠 수도 있다며 협박하더라고. 엄마는 정주가 공부해서 좋은데 시집가기를 바랐건만, 엄마의 쪽박이 깨지게 생겼더란다. 정주는 떠날 테니, 엄마는 다치게 하지 말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정주 엄마는 부둣가 술집 색시들 엄마였고 일명 포주였다. 내게는 싸우다가 불어버린 비밀이었고. 누가 부모에 관해 물으면 개인 사업자라고 한다는데. 별로 개의치 않는 듯해도 가장 큰 콤플렉스 같았다. 여인숙을 전전하며 그의 학교를 찾아가 봤으나 만나지 못했다고. 휴학하고 유학 준비 중이라는 말만 듣고 마산으로 내려왔단다. 그의 집 앞에도 가보고 골목에서 기다려도 봤지만 만나지 못했다고. 며칠 만에 가정부를 만나 그의 소식을 들었단다. 그의 어머니가 실신해서 며칠이나 입원하는 바람에 서울에는 갈 수 없었을 거라고, 누나가 서울로 오가며 서류를 만들고 쫓기듯 일본으로 유학을 갔단다. “마산 너희 집에도 찾아오지 않았니?” “내가 우리 집을 말해 준 적이 없지. 거기 살지도 않았고.” “어디 살았어?” “너는 죽다 깨어나도 모를 세계에서. 될 대로 되라 싶었지.” “미쳤어.” “더 해야 하나?” “됐어.” 정주 인생의 내리막길이 더 나쁘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힘들 것 같았다. 둘 다 입을 다물었다. 풀벌레 소리는 우리가 없는 듯 요란해졌다.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측은해서 바라봤는데 도리어 담담했다. 지금까지 내게 들려준 사연은 감정이 배제됐을까. 더는 말하지 않을 줄 알았건만 침묵을 깼다. “엄마가 술김에 약을 먹어버렸대.” 나는 얼굴을 돌리지도 못한 채 얼어버렸다. 한기가 엄습한 듯 온몸이 떨려왔다. 남의 일처럼 말하는 그녀가 어이없었다. 위로해야 하지만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아 버리고 싶었다. 바짝 다가앉았다. “그게 뭐야. 도대체 그까짓 사랑이 뭐라고. 어떻게 될 대로 되라고 살아버릴 수가 있어? 엄마 때문에라도 정신을 차렸어야지. 철든 척은 혼자 다 하면서.” 나는 목소리는 낮췄으나 돌벽을 치듯 질책을 했다. 정주는 당해도 싸다는 듯이 달만 보고 있었다. 어릴 적 사랑의 불장난이었다고 하기엔, 그녀 인생이 너무나 가혹했다. 그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정주가 절에 있다고 했을 때 왜 냉담한 척했을까. 내가 물어보기 전에 정주 소식을 먼저 물어봤어야지. 싫어서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부모가 갈라놓는다고 잠적해버리다니. 비겁한 자식. 나중에라도 찾았어야지. 가책이라도 느끼게 정주 앞에 끌어 다 놓고 싶었다. 그때도 냉담할 수 있을지. 제발 오래도록 자책하고 괴로워했으면 싶었다. 그녀가 달빛을 구기며 일어섰다. 달그림자에 키가 더 커 보였다. “정주 인생이 그렇게 흘러왔네.” 나는 질질 울었다. 그 자식을 또 만난다면 귀싸대기를 후려갈겨 주고. 인생 그따위로 살지 말라고 이죽거려 주고. 이게 왜 책임질 일이 아닌지 따지고 싶었다. 무책임한 자식!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댔으나, 그녀의 담담함에 비난이 쑥 들어가 버렸다. 대신, 애초에 나하고 친구가 되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랬으면 그토록 그에게 집착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책만 늘어놓았다. “무슨 소리!” 이제야 나한테 밀린 숙제를 한 것 같단다. 나를 일으켜 양어깨를 툭툭 쳐주고는 달빛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천천히 걷는 모습엔 예전의 그녀는 없었다. 다 벗어버린 자의 초연함만 승복에 실렸다. 원을 그리듯 한 바퀴를 돌아와서 벙긋이 웃었다. 달빛 받은 콧날은 여전히 정주이나, 무늬 없는 도기같이 맑아 보였다. 그녀는 내게 밀린 숙제를 한 것 같다는데, 나는 그녀 인생이 목구멍 가시처럼 남아 통증을 더했다. “너를 보니 그를 본 듯하네. 몹쓸 기억이야.” “아름다움으로 바꾸지 못한 추억은 유죄야.” “제법인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거라.” 그녀가 농담처럼 가볍게 던지는 말에도 나는 아팠다. 서로를 껴안았다. 장삼 품이 내 작은 몸을 온전히 감쌌다. 나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눈물을 그녀의 장삼에 흥건히 묻혔다. 그녀를 견제해 왔던 자잘한 감정들이 씻겨나갔다. “잘 자고 내일 아침 먹고 내려가.” 같은 방에 잤으면 했는데 이부자리를 펴주고 나갔다. 문 앞에서 미소 한번 띄워 주는 모습만으로 돌아섰다. 장삼으로 감싼 고통이 언뜻 보여 목이 메었다. 뒷모습엔 정주는 없고 단아한 여승만이 달빛 비치는 마당 가로 걸어갔다. 방문을 닫았다. 고무신 타박이는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산사의 정적이 순식간에 짓눌려왔다. 옷을 입은 채로 이부자리에 들었다. 문예지를 준 게 후회되었다. 지금쯤 소설 「달빛 키스」를 읽지 않을까. 그녀의 묵은 감정을 들쑤셔놓는 건 아닌지. 그날의 달빛 키스는 영원히 무죄라고. 그녀가 또 상처받는데도 나는 달빛 키스는 하고 말리라고. 결국 사랑의 큐피드는 내 것이었다고. 그 남자와 신혼여행 가는 장면까지 써놨으니. 소설이지만 내 감정이 오롯이 들어간 걸 알았을 텐데. 번뇌 접은 스님으로 웃어넘겨 줄까. 부끄럽고 미안했다. 내가 만나러 온 게 잘한 건지. 도리어 그녀의 혼란만 키운 건 아닌지. 면벽의 시간이 길어질지도 모르겠다. 새벽 목탁 소리가 났다. 잠 못 이룬 그녀의 수행이지 않을까. 마주 보며 돌아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장삼으로 감싼 그녀의 고통을 보아낼 자신이 없었다. 불을 켜지 않고 잠자리를 정리했다. 방문을 살며시 열었건만, 뒤뜰 강아지들이 낑낑대며 달려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살그머니 산사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분명 내가 가는 것을 알았을 텐데 내다 보지 않았다. 드러내지 않는 그녀의 고통이 느껴졌다. 서로를 보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다. 여명이 깃드는 산길을 내려왔다. 또 올 수 있을까. 그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 스님 만나러 올 수 있었으면. 어색하지 않게 여정스님으로 부를 수 있었으면. 버스를 기다렸다. 승복 입고 예쁜 코를 찡그리며 웃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게 얼마나 오랜 고통으로 남으려고 눈에 어릴까. 소설을 써야겠다. 미소 한 번 띄워 주는 모습만으로 돌아서던 그녀를 위해. 최숙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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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미 연재 단편소설 "달빛 키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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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 에세이(3) 세상의 고양이들은 뭐 하고 있나
- 이재학 에세이(3) 세상의 고양이들은 뭐 하고 있나 오늘도 쥐의 공격을 받았다. 예전에도 쥐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그때는 일회성 공격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쌀 포대를 공격하는 쥐를 잡았다고 안심하면 또 다른 쥐가 공격을 하고, 또 쥐를 잡으면, 또 다른 쥐가 공격을 하는 식의 연속적인 공격이 이루어졌다. 나는 쥐의 공격에서 쌀 포대를 지키느라 신경이 예민해졌다. 쥐를 잡으려면 쥐의 생리를 잘 알아야 한다. 쥐가 쌀 포대를 공격하는 길목에 지뢰(쥐 끈끈이)를 설치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지뢰를 설치하더라도 무용지물이다. 나는 정확히 쥐가 다니는 길목에 지뢰를 놓고 쥐를 잡았지만 쥐들은 집요하게 공격을 해왔다. 쥐들도 우리 인간이 정보를 공유하듯이 정보를 공유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예전의 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쥐들과 전쟁을 하느라 힘들었다. 그때 우리 집을 포함한 주변지역을 관할하는 고양이를 만났다. 우리는 가끔 길에서 마주치곤 했다. 고양이를 보자 갑자기 화가 폭발했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정말 세상의 고양이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분노의 외마디를 외치고는 담장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이 아저씨 오늘 바쁜가?” 고양이가 갑작스런 나의 질문에 놀란 듯 멍하니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양이가 귀찮다는 듯이 물었다. “사장님 왜요?” “고양이 아저씨 면담 좀 하고 싶은데.” 내 말에 고양이는 태도를 바꾸면서 물었다. “무슨 일로요?” “우리 집에 쥐들이 많이 늘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내 말에 갑자기 고양이가 야옹하면서 웃었다. 그 웃음은 마치 나를 비웃는 듯 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인상이 찌그러졌다. “쥐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세요?” 나는 고양이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쥐 이야기를 고양이한테 안 하면 누구한테 한단 말인가? 그럼 개한테 쥐 이야기를 하란 말인가? 내가 헛웃음을 짓는 사이 고양이가 말을 이어서 했다. “사장님 요즘 세상에 쥐를 잡아먹는 고양이가 어디 있어요. 사장님 주변을 한번 둘러보세요. 먹을 게 철철 넘치는데 힘들게 쥐를 잡으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요? 사장님이라면 쥐를 잡겠다고 고생하시겠어요?” 고양이의 예상치 못한 답변이었다. 고양이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우리 집 골목만 하더라도 고양이 밥을 챙겨주는 곳이 있다. 그뿐만 아니었다. 고양이들은 밤이면 사람들이 내놓은 쓰레기를 뒤졌다. 고양이의 말처럼 힘들여 일해서 밥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밥이 있는 곳을 찾아서 순례를 하면 되었다. 내가 답변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고양이가 말을 했다. “사장님 내 말이 맞지요. 그러니 쥐들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요즘 쥐들은 우리 고양이들을 보아도 부리나케 피하지 않아요. 그냥 어슬렁거리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쥐들도 우리 고양이들이 자신들을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이런 모습을 보고 세상 망조가 들었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어요.” 고양이의 말이 맞다. 쥐와 고양이는 이제 서로상관이 없다는 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내가 미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돌아서려는데 고양이가 불렀다. “사장님 그래도 저는 자존심이 있는 고양이에요.” 갑작스런 고양이의 자존심이라는 말에 발길을 멈추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담장 위의 고양이에게 물었다. “자존심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고양이가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했다. “많은 고양이들이 야생의 본능을 포기하고 개처럼 사람들 집에서 살고 있는 것 알고 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는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도 다 자라면 대개는 집을 벗어나 떠돌이생활을 했다. 요즘 고양이들은 다 자라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 고양이들도 세대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싶다. “저도 다른 고양이들처럼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사장님이 아는 것처럼 전 고양이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스스로거리로 나왔습니다. 당당히 경쟁해서 이 구역을 차지하고 있고요. 그러니 자존심 있는 고양이가 맞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슬쩍 고양이를 자극했다. “그럼 끝까지 자존심을 지켜야지.” “무슨 말씀이죠?” “자존심을 지키려 편한 삶을 포기했으면 밥도 스스로 구해 먹어야지. 밥은 사람들에게 의지하면서 정말 자존심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양이가 내 말에 몸을 웅크리고는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쥐를 잡아서 밥을 해결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거리로 나와 제일 힘든 건 역시 밥을 먹는 일이었고요. 그래서 많은 고양이들이 집을 떠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전 정말 제 자존심의 반을 밥과 맞바꾸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이게 저의 현실입니다.” 말을 마치자 고양이는 겸연쩍은 얼굴로 야옹하고 웃었다. 나도 더 이상 고양이를 몰아세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반쪽의 자존심이라도 지키려 분투하는 고양이를 응원하기로 했다.(2022) 이재학 에세이(3) 세상의 고양이들은 뭐 하고 있나 (20251211이재학) 이재학 작가 마라토너, 소새울 소통미디어 협력단 대표, 부천 소새울에 산다 발행인(전), 복사골문학회, 부천작가회의, 부천수필, 부천시인 저서 『나는 마라토너다』 『길에서 다시 찾은 행복마라톤』 『황소도 말처럼 뛰나』 『엄마가 치매야』 『소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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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창작
-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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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학 에세이(3) 세상의 고양이들은 뭐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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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미 단편소설 연재 "달빛 키스"(2)
- 정주가 한동안 나를 못 본척했다. 나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어느 날은 요즘 예뻐졌다며 무슨 좋은 일 있느냐고 물었다. 뜨끔하기는 했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사실은 눈만 뜨면 키스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설레었다. 사진이라도 있으면 닳도록 꺼내 볼 것만 같았다. 몇 주가 지나고, 지난번에는 미안했다며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했다. 혹시 걔를 만날 수 있으려나. 못 이긴 척 따라갔다.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적막했다. 팔손이나무 사이로 보이는 거실 유리창 앞엔 키 큰 국화 화분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정주는 두리번거리는 나를 끌고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사 들고 간 떡볶이를 먹었다. 자기 집은 학교에서 멀어 여기서 산다고. 나는 학교와 가까워 연보라색 통학버스가 타고 싶었건만. 이곳은 자기 엄마가 아는 일본인 회사 간부 집이라고. 빈방이 있다며 와서 살라고 했단다. 남학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주인아주머니는 차갑고 말이 없어 눈치를 보게 된다고. 언니 같긴 해도 말 없는 정주가 아니었다. 주인아주머니 눈치를 본다는 말에 갑자기 친숙해졌다. 나는 본 적도 없는 주인아주머니 험담을 늘어놨다. 정주는 수다도 떨 줄 아냐며 웃어 재꼈다. 수업이 끝나면 둘이서 미술실로 가는 연못가에서 놀았다. 돌 틈엔 붓꽃이 피고 졌다. 정주는 팝송을 곧잘 했다. crazy love를 소리 낮춰 부르다가 멍하게 앉아 있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묻기도 뭣해서 말없이 헤어지곤 했다. 가끔 내 가방을 뒤져 친구에게 쓴 편지를 읽어보았다고 했다. 내가 무슨 연애편지라도 쓴 줄 알았는지. 싸울 듯 덤볐으나, 상대를 해주지 않고 눈만 찡긋하고는 넘어갔다. 함께 울어도 서로 다른 이유로 울었다. 정주는 내 속은 빤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감춰 친구 같지 않은 때도 많았다. 어떨 땐 나를 떼어 놓고 미술실엘 갔다. “너는 왜 미술실에 자주 가니?” “숙제가 잘 안돼서.” 미술 숙제는 늘 골치였다. 넥타이나 양말을 그려오라거나 비누로 조각을 만들어오라거나 했다. 미술 시간에는 작품 품평을 했기에 숙제는 평소에 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랑 같이 가야 하는 게 아닐까? 미술실을 들락거리는 정주가 부럽기는 해도, 무턱대고 따라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미술 선생님은 키도 크고 배우처럼 잘 생겨서 여학생들이 까무러칠 듯 좋아했다. 정주도 분명 그러리라 짐작했다. 키스도 못해 볼 거면서 들락거리기만 하면 뭐해? 입을 삐죽거리며 돌아섰다. 내 속에는 달빛이 황홀한 밤바다를 보며, 낯선 남학생과 나눈 달빛 키스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으니까. 산복도로에서 숨이 멎을 것 같은 순간이 있었다. 걔와 비슷한 남학생이 여학생 손을 잡고 올라오고 있었다. 해그림자에 선명치는 않았으나, 사각턱이 단정한 게 걔였다. 어디로 숨어버리고 싶은데 그럴 곳이 없었다. 서너 걸음 앞에서 눈이 마주쳤다. 걔가 여학생 손을 놔버렸다. 여학생이 왜냐고 짜증을 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으나 분명 알았다. 걔도 나를 알아보았고, 그날 밤이 떠올랐다는 것을. 여학생의 손을 놔버려야 할 만큼 황홀한 키스였다는 것을. 나는 배시시 웃었다. 왠지 그 여학생과 겨뤄 이긴 것 같았다. 달빛 키스는 안 해봤으리라는 막연한 우월감이었다. 비록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으나, 걔의 착한 눈빛은 나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종종 정주네로 갔다. 그날 밤도 핫도그 두 개를 사 들고 케첩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나무계단에 올라서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달이 없어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방문 앞에서 정주를 불렀다. 불빛은 새어 나오는데 인기척이 없었다. 방문을 열었다. 두 물체가 후다닥 떨어졌다. 정주와 걔였다. 정주는 천천히 셔츠를 내려 탱탱한 가슴을 덮었고, 걔는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정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얼얼하게 돌아섰다. 좁은 마루가 천리만리 길었다. 속이 메슥거려 겨우 정원으로 내려섰다. 들고 있던 핫도그를 팔손이나무에 던져 버렸다. 집으로 가지 못하고 거리를 헤맸다. 정주의 탱탱한 가슴이 코앞에서 어른거렸다. 정주 가슴에서 얼굴을 빼던 걔의 당황한 눈빛은 보지 말았어야 했다. 상기된 얼굴에 벌어진 입술까지. 나와 키스했던 그 촉촉한 입술이. 그들의 짓거리에 고통은 왜 내 몫이 되는 건지. 한숨을 내쉬며 앞섶을 쓸어내렸다. 작은 가슴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모멸감에 자존심이 더 상했다. 저들은 언제부터 사귀었을까. 달빛 키스 전이라면? 정주가 우리의 사건을 알까. 일부러 둘 사이를 알게 하려고 인기척을 못 들은 척했을까. 걔도 못 들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정주의 탱탱한 가슴에 묻혔으니 귀가 열릴 리 없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들에게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지. 가당치도 않은 배신감까지. 언제 걔와 말을 터보기를 했나. 그 흔한 쪽지 한번 주고받길 했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걔가 있었던 것일까. 울컥 울음이 차올랐다.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냉대당한 것처럼. 낭만적인 키스가 더럽혀지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채를 흔들어 그들의 영상을 떨쳐내려 했으나, 늦은 밤까지 골목만 헤매게 했다. 정주를 피했다. 저도 피하는 나를 그냥 뒀다. 겨울방학이 되고 연탄 방에 배를 붙이고 있는데 정주가 왔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란다. 어지럽다며 한 시간만 쉬었다 가겠다고. 거절하기도 뭣해서 틈을 두고 누웠다. 정주가 자꾸만 뒤챘다. 어디가 아프긴 한 모양이나 묻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가겠다고 했다. 정주가 가고 화장실에 갔더니 큰 패드가 떨어져 있었다. 칠칠찮게 생리대를 떨어뜨리고 그랬을까. 왜 어지럽다고 했지? 평소에 덜렁대지도 않는데 웬일이지? 더 이상의 상상은 ‘설마’라는 단어로 막아버렸다. 여고 졸업식 날,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며 한껏 졸업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멀찍이 정주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막혀서. 그날 밤에 정주가 왔다. 나도 그동안의 불편한 관계를 털어내야만 할 것 같았다. 정주가 이불속으로 발을 뻗으며 소문내지 않아서 고마웠다고 했다. “무슨 소문?” “나도 소문내지 않았어.” 정주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머리에 피가 다 말라버리는 것 같았다. 설마, 달빛 키스를 알고 있나?. 걔가 말해 버렸을까? 그런 건 무조건 비밀이지 않나. 노련한 정주 꾐에 넘어갔을 수도 있겠다. 멍청이 같으니. 원망과 방어가 팽팽해졌다. “그날 밤 키스는 어땠어?” “무슨 말이야?” “봤어. 나갔다 들어오는데 그러고 있더라.” “팔손이나무 뒤를 스치던 이가 너였니? “응.” “그 순간은 건드리지 마!” 정주가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내가 방문 앞에서 불렀을 때 왜 대답 안 했냐고 물었더니 재밌을 것 같아서란다. 나는 그게 나한테 할 짓이냐고, 음흉스럽고 무서운 애라고 쏘아붙였다. 인생 다 산 사람처럼 한숨을 푹 내쉬더니 대사를 외듯 말을 이었다. “달이 밝은 날을 기다렸어. 걔를 불러들이고 니들이 섰던 자리에 나란히 섰지. 내게 키스해 주기를 바라면서. 그러지 않더라. 내가 먼저 시도했어. 피하는 거야. 모멸감에 미칠 것 같았어. 왜 그랬을 것 같니?” “내가 알 게 뭐야.” “니들의 감정을 느끼고 싶었어. 아니 빼앗고 싶었어. 아니 뺏어야만 했어. 나는 걔를 너보다 먼저 알았고 서로 사랑했으니까. 근데 그 순간을 피하는 거야. 뺨이라도 때리고 싶었어. 왜 걔하고는 되고 나하고는 안 되느냐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어. 근데 말이야. 니들의 키스를 내 입으로 말하기는 정말 싫더라. 초라해질 나를 감당할 수 없었거든.” “그런 얘기를 왜 해?”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눈을 내리깔더니 말투가 슬퍼졌다. “걔가 계단을 내려가 버렸어. 나는 걔를 알고 처음으로 울었어. 질투에 울었던 거지. 그 순간은 건드리지 말라는 네 말과 걔의 태도가 맞아떨어지지 않니? 말하는 이 순간도 기분이 별로다.” “......” ”진심으로 어떤 감정인지 알고 싶었어. 말해줄래?“ “그만해라.” “질투 해봤니? 미치도록. 내 감정이 그랬어.” “내가 걔를 뺏은 것도 아닌데. 왜 이래?” “니들의 관계를 넘어서야만 그 사랑이 온전해질 것 같았어. 내 영혼이 걔 영혼과 합치기를 원했거든.” 정주가 나를 시험하듯 빤히 쳐다봤다. 내 속을 파헤쳐 그때의 감정을 뽑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까만 눈동자에 어리는 뭔가에 움찔했다. 질투인지, 미움인지 분노인지. 그 순간이 너무 길었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밀려 중얼거렸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게.” 정주가 까르르 웃었다. 종잡을 수 없는 건 여전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정말 미안했다고. 질투는 했어도, 나를 미워하지는 않았단다. 유일한 친구를 놓치고 싶진 않았다고. 친구이긴 한 건지. “듣기 싫어.” “그날 너 오기 전엔 얘기만 하고 있었어. 마루 걷는 소리가 너 같더라고. 네가 문 여는 동시에 셔츠를 올리고 걔를 끌어당겨 내 가슴에 묻어버렸지.” “미쳤어. 미쳤어.” “나는 질투로 미쳐 있었어. 걔가 그 순간을 침범치 못하게 하는 태도 때문에.” “나보라고 그런 짓을 해?” “그래서 지금 사과하잖아.” “너 소문이란 게 뭐야?” “임신했었어.” 거침없는 정주로 인해 내 인생에 ‘설마’ 하나가 사람을 잡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설마’에 위안을 삼고 살지만, 그날의 ‘설마’는 세상 모든 신뢰를 내동댕이쳤다. 학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대들었다. 정주는 폭우 같은 사랑 앞에 학생은 비닐우산 같았다고. 내가 낯선 남학생과 키스한 게 더 황당하단다. 할 말이 없었다. 누구와 사귀어본 적도 없는 나는 달빛 키스만이 낭만 1순위였건만. “걔가 혹시 너한테 온 적은 없니?” 이건 또 무슨 저격인지. 나는 펄쩍 뛰었다. “나는 걔 이름도 몰라. 우리 집은 더더욱 모르고. 그 순간일 뿐이야. 바람둥인가 보네. 언젠가 여학생이랑 손잡고 오는 걸 산복도로에서 봤거든. 너랑 사귀면서도 그런 거겠지? 착한 얼굴로 여러 여자 울리나 보네. 나쁜 자식.” “애는 착한데 연애를 즐겨.” “그러니까 나쁜 자식이지.” “내가 그 여자애랑 찢어놨어.” “대단들 하다.” 정주가 헛헛하게 웃었다. 그녀의 자괴감 드는 사랑 타령을 더 듣고 있다간, 속없는 내가 위로라도 할 것 같아 밖으로 나와버렸다. 30분이 지나도록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피장파장 서로 소문내지 않았으면 된 거지. 걔는 연애 즐기느라 나와 달빛 키스를 한 거로군. 내게는 빛나는 보석인데. 골목을 내려가는 정주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큰 키에 청바지 입은 엉덩이가 볼록하고 탄탄했다. 정주의 성숙한 몸매는 깡마르고 밋밋한 내 몸을 언제나 초라하게 만들었다. 질투 나는 몸매로 잘생긴 걔를 가졌으면 된 거지. 나의 짧은 낭만까지도 뺏으려 들다니. 못된 계집애. 나는 지방 대학 국문과에 들어갔고, 정주는 재수학원 다닐 거라며 서울로 갔다. 걔가 서울 명문대에 합격했다더니 따라간 것 같았다. 나는 미팅도 하고 퇴짜를 놓고 퇴짜도 맞으면서 대학 생활을 즐겼다. 4학년이 되면서 소설로 문예지에 당선이 됐다. 소설 「달빛 키스」로 연인들의 낭만을 부추기며, 연애 소설 쓰는 재미에 빠졌다. 가끔 정주가 궁금하기는 했으나, 달빛 키스로 밀어내 버리곤 했다. 과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 나는 글쓰기 동아리 리더를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 남자를 다방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정주가 스님이 되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날이 갈수록 정주 인생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자신이 택한 길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데도 마음이 혼란스럽고 글도 써지지 않았다. 정주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정연사 돌계단에 걸터앉았다. 여기까지 오긴 해도 승복을 입은 그녀를 마주 볼 일이 막막했다. 스님이 된 정주는 속세를 다 잊었을까. 사랑도 우정도. 절 마당에 올라서니 여승이 다가와 합장을 했다. 여고 때 정주 사진을 보여주며 스님을 만나러 왔다고 했다. 여승은 나를 작은 암자로 안내했다. 십 분쯤 지나니 누군가 다가왔다. 방안 문고리를 잡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문을 열었다. 여느 여승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정주였다. 표정이 맑고 편안해 보이는데 나는 목이 메었다. 질투 많고 거침없던 정주 같지 않았다, 예쁜 콧날을 찡그리며 웃었다. 이름을 부르질 못해 머뭇거렸다. 그녀가 칸츄리! 하며 내 손을 잡았다. 진땀이 났다. 어떻게 우리 둘 사이에 이런 만남이 있을 수 있을까. “말 놔도 되는지.” “그럼 친군데.” “왜 이런 모습이야?” 눈물이 괴고 말았다. 그녀도 눈자위가 발그레해졌다. 나는 눈물을 훔쳐 가며 따지듯이 물었다. “네가 이럴 이유가 뭐였는지 말해 봐.” “배고프지? 국수부터 먹자.” (계속) 작가 최숙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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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미 단편소설 연재 "달빛 키스"(2)


